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기원전 어느 날 밤, 이스라엘의 도시 베툴리아에 살고 있는 과부 유디트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이웃집은 불타고 있고, 남자건 여자건 피범벅을 한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아시리아 군대가 베툴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모두들 적의 눈을 피해 숨기에 급급했지만, 유디트는 달랐다.
그는 손에 칼을 쥐고 결심했다.
"적장을 죽여서 고향을 지켜야겠다.
"유디트는 '미인계'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했다.
홀로페르네스가 자신의 옆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그는 하녀의 품 속에 숨긴 칼을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벴다.
칼날에 짓눌린 홀레페르네스는 깨어나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늦었다.
눈 앞에 다가온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전쟁 영웅' 유디트의 일화는 수많은 화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됐다.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대표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는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고, 홀로페르네스가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극적인 순간을 담았다.
눈에
띄는 건 유디트와 하녀의 포즈다.
둘은 다부진 팔로 홀로페르네스를 완벽히 제압한다.
연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엔 젠틸레스키의 개인적 경험도 반영돼있다.
그는 10대 때 아버지가 붙여준 미술 강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재판부는 젠틸레스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 전 순결을 지켰다는 점을 증명하라"면서 그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혔다.
젠틸레스키는 이런 복수심과 분노를 그림에 반영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거침없이 베는 유디트에도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한다.
젠틸레스키는 자신의 그림을 사는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어.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젠틸레스키와 같은 시기, 바로크 시대를 휩쓸었던 거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도 유디트를 '뮤즈'로 삼았다.
그가 캔버스에 담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모습은 젠틸레스키의 그림보다 더 극적이다.
흰 이불엔 선혈이 낭자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홀로페르네스의 표정도 더욱 사실적이다.
칼을 쥐고 있는 유디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고, 주름진 얼굴의 하녀는 그 옆에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다.
카라바조가 목을 베는 장면을 이렇게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가 유디트 그림을 그리고 있던 1599년, 로마에선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이름의 여성이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공개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카라바조는 실제 처형장에 가서 첸치가 참수당하는 장면을 실제 목격했고, 그 모습을 참고해 이 그림을 그렸다.
클림트, '유디트'
유디트가 잔인한 모습으로만 그려진 건 아니다.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유디트를 관능적인 팜므파탈로 그려냈다.
클림트 작품 속 유디트는 상반신을 노출한 채 반쯤 감은 눈으로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려한 금빛 장신구과 배경까지 보면 마치 귀족 여인의 초상화 같다.
하지만 오른쪽 밑부분을 보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유디트가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건 잘려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다.
적장을 유혹할 만큼 매혹적인 팜므파탈, 그 여성에게 매혹된 남성의
잔인한 최후를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낸 것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세기의 발레 화가, 그가 그린 건 가난한 소녀들의 고통과 슬픔
[arte 납량특집-미술편] 에드가 드가의 발레 그림
L'etoile (1987)
하늘로 날아갈듯 뻗어낸 두 팔, 붉은 볼에 옅은 미소.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가 1878년 그린 '스타(L'étoile)'는 발레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주인공이 화면 중심을 벗어나 있는 모습, 뒤로 젖힌 발레리나의 얼굴과 왼쪽 팔을 극단적으로 축소한 기법, 다른 무용수를 과감히 지워버린 구성 때문이다.
이 우아하고 아름답기만한 그림은 알고 보면 '무서운 그림'이다.
커튼 뒤에 서 있는 검정 옷의 얼굴 없는 남자가 보이는가.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 명의 발레리나(1879)
드가는 평생 남긴 3000여 점의 그림 중 절반 이상을 발레 그림만 그렸다.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드가가 당시 귀족들이 사랑한 발레에 빠져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의 발레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보단 현실적인 장면이, 낭만적이기보다 비판적이고
서늘한 시선이 많다.
평생 혼자 지낸 드가는 여성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안고 살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사건은 이렇다.
아름다운 유럽계 혼혈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남동생, 즉 드가의 삼촌과 바람을 피우는 일이 벌어진 것.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에 이를 못 본 척 했고, 어머니는 드가가 13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는 폐인이 됐다.
드가는 이 사건들을 가슴에 묻고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드가는 어머니를 평생 증오하고, 환멸했다.
죽을 때까지 여성을 멀리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을 갖게 됐다.
노란 발레복의 무희들. (1874–1876)
자산가의 장남이라 생계 걱정 없이 살던 드가는 마흔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사망으로 빚더미에 앉는다.
그림을 팔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는 '팔리는 그림'을 고민했고, 그때부터 발레와 경마처럼 상류층 문화를 담은 그림을 그렸다.
오페라 극장과 발레 교습소에 살다시피 하며 '무희의 화가'라는 별명도 얻었다.
벨렐리 가족. (1858)
그가 그린 발레리나들은 마냥 우아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당시 발레는 불우한 환경의 소녀들이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춤을 추기 위해 고통스럽게 하루 종일 훈련하고, 무리하게 관절을 비틀어 불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성공한 발레리나는 당시 교사 연봉의 8배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자신의 운명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것. 이런 약점을 이용해 귀족과 자본가 남성들은 어린 발레리나들과
쾌락의 밤을 보내기 위해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찾아가 돈을 주고 유혹하는 일이 잦았다.
카페에서 (1875-1876).
드가가 그린 '스타' 그림 속 검은 옷의 남자는 아마도 그런 속물 중 하나였을 테다.
어린 소녀들에겐 유령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을 테다.
이걸 알고 보면 발레리나의 목에 걸린 검정색 끈은 억압과 속박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그가 그린 많은 그림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눈빛이 공허하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발레 그림의 다수는 발레의 화려한 모습 대신 그 안에 갇혀 발버둥쳐야 했던 어린 무용수들의 고통을
담고 있다.
얼굴은 대부분 흐릿하게 지워져 있거나 일그러진 표정이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운명은 나와 비슷하다"고도 말하며 많은 시를 쓰기도 했다.
어린시절부터 가졌던 여성에 대한 지독한 혐오, 어쩌면 드가는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 곁을 평생 맴돌며 그 트라우마를 연민과 사랑으로 승화했던 것은 아닐까.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음대 졸업 이후 오래된 악기를 내려놓고 펜을 잡은 클래식 음악 담당 기자.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베르디가 써낸 '죽음의 소리' [김수현의 마스터피스]
[아르떼 납량특집] 김수현의 마스터피스베르디의 '레퀴엠''두 거장의 죽음' 계기로 작곡초연 대성공…유럽 전역 '환호'대표 악곡 '진노의 날'거대한 음량·극적인 악상극한의 압도감·공포심 유발
지휘자 카를로 사바즈노와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합창단의 베르디 '레퀴엠' 음반(1929년 녹음) 표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중 일부 이미지를 표지 삽화로 사용한 모습. 프리스틴 클래시컬 홈페이지 캡처
예술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래전부터 음악가들은 죽음에 대한 원초적 감정을 음표로 토해내며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켜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며 최후의 걸작 ‘레퀴엠’을 지었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인생에서 끝없이 마주한 죽음의 형상을 토대로 ‘마왕’,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등을 남겼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작곡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교향곡 6번 '비창'도 죽음에
가까워진 그가 남긴 음악적 유서로 알려져 있다.
‘오페라의 거인’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도 죽음에 대한 영감으로 불멸의 대작을 써낸 인물 중 하나다.
그의 ‘레퀴엠’은 모차르트 작품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퀴엠(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으로 꼽힌다.
특히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디에스 이레)’은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공포감을 선사하는 악곡으로 유명하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격렬하게 뻗어 나오는 오케스트라 음향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
극한의 두려움에 처절하게 울부짖는 남녀의 목소리가 쏟아지며 청중을 압도한다.
마치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음 이후 심판의 날이 올 테니 어떠한 죄도 짓지 말라’고 경고하듯이.베르디의 레퀴엠은 우여곡절 끝에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다.
베르디가 처음 레퀴엠을 구상한 건 1868년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애초 계획은 베르디를 포함한 12명의 작곡가가 레퀴엠의 각 부분을 작곡해 로시니 서거 1주기에 작품을 초연하는 것이었다.
이에 베르디는 자신의 몫인 레퀴엠의 마지막 악곡 ‘리베라
메’를 작곡했는데, 추진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겹치면서 결국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최후의 순간 등장할 악곡이 베르디 레퀴엠의 시작점이 된 셈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베르디가 레퀴엠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린 건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때였다.
1873년 5월 22일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자 이탈리아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문호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베르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지독한 슬픔에 장례식도 가지 못하고 일주일 뒤에야 그의 묘소를 찾아 통탄했다.
당시 그의 비통한 심경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성스럽고
고귀한 우리의 최고 영예가 사라졌다.
”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베르디는 만초니를 추모하기 위해 레퀴엠을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이듬해 4월 완성된 베르디의 레퀴엠은 만초니 서거 1주기에 맞춰 밀라노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초연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20여 명의 합창단과 110여 명의 관현악단,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 테레사 스톨츠 등이 무대에 올라 선보이는 장대한 레퀴엠에 청중은 열광했다.
이후 베르디의 레퀴엠은 파리, 비엔나, 런던 등 유럽 전역에서 잇따라 공연되며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갖춘 명작으로 인정받게
된다.
종교음악에 이토록 많은 나라의 청중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르디의 레퀴엠은 성직자 복장을 걸친 오페라”라고 혹평했다.
거대한 구성과 규모, 화려한 선율, 극적인 악상 표현 등 작품 특유의 음악적 요소가 베르디가 그간 써온 오페라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경건함을 중시하는 종교음악이라 규정하기엔 지나친 면이 있단 지적이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이에 대해 “뷜로는 스스로 바보가 되었다.
이것은 천재의 작품”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와 몬테베르디 합창단·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음반(1995년 발매) 표지. 사진=필립스 클래식스
베르디 레퀴엠을 대표하는 악곡은 단연 ‘진노의 날’이다.
일찍이 아내와 두 자녀를 병으로 잃어야 했던 베르디의 어두운 내면세계가 표출된 것으로도 해석되는 이 악곡엔 인간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감정, 고찰, 경험 등이 음악적 언어로 표현돼 있다.
작품은 네 차례 같은 음을 세게 내려치는 팀파니와 관현악기의 강렬한 도입부로 문을 연다.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등 목관이 아주 빠르게 16분음표를 쏟아내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형상을 드리우면 테너·베이스 성악 성부가 등장해 아주 고통스럽게 "진노의 날"을 포효한다.
이내 소프라노·알토 성악 성부까지 포개지며 거대한 음량으로 심판에 대한 공포를 극적으로 토해내면, 현악이 아주 거친 터치로 빠르게 하행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후 주요 악기와 성악 성부가 통상적 강박인 첫 음이 아닌 두 번째 음에 악센트(특정 음을 세게 연주)를 넣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한 채 심판대에 강하게 얽매인 인간의 고통과 절망감을 드러낸다.
저음의 육중한
음색과 고음의 애달픈 음색이 하나의 두꺼운 선율을 이루며 숨이 막힐 정도의 압도감을 선사한다.
이내 성악 성부가 소리와 속도를 줄이며 불안감을 낮추려 할 때, 외려 고음역의 관현악 선율이 더 가파르게 솟구치면서 극한의 감정을 토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악 성부가 목소리를 낮춘 채 “심판관이 오시는 날, 크나큰 공포가 오는 날. 모든 것을 엄히 다스리도다”라고 속삭인다.
점차 모든 악기의 색채, 울림도 옅어지면서 악곡은 끝을 맺는다.
마치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고 온전한 죽음이 드리우듯이.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글루미 선데이'가 연쇄 자살 부른다? 오,비운의 빌리 홀리데이
[오현우의 듣는 사람]
1919년 3월 13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의 지역 신문 타임스피카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도끼맨(Axe-Man)’이라 소개한 뒤 “18일 저녁 12시 15분께 뉴올리언스를 찾아갈 것이다.
이때 재즈를 연주하면 살려주겠다”며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에 있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악마에게 맹세한다”고 썼다.
신원도 모르고 내용의 사실 여부도 밝혀지지 않은 협박이지만 뉴올리언스 시민은 공포에 떨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선 10개월 전부터 연쇄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다.
1918년 이탈리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부부가 살해된 뒤 또 다른 식료품 매장 주인이 살해당했다.
수법은 비슷했다.
모두 도끼를 활용해 살인했다는 것. 뉴올리언스 전역에 도끼맨에 대한 공포가 확산했다.
18일 밤이 되자 뉴올리언스의 모든 재즈바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재즈바가 없는 소규모 마을에선 재즈 파티를 벌였다.
재즈를 조금이라도 연주할 수 있는
주민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악기를 들고 밤새 재즈를 연주했다.
모두 도끼맨의 협박 편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묘한 밤이 지나고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도끼맨이 약속을 지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도끼맨은 다시 흉기를 꺼내 들었다.
같은 해 8월부터 3개월간 5명이 숨졌다.
주민들은 혹시 자신들의 마을에 도끼맨이 찾아올까 두려워 매일 재즈를 연주하고, 들었다.
총 12명의 피해자가 나온 연쇄살인은 같은 해 10월 멎었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은 미결로 남게 됐다.
재즈 작곡가 조셉 존 데이빌라는
이 사건에 대해 듣고 ‘기묘한 도끼맨의 재즈’란 곡을 발표한다.
3분 안팎의 짧은 피아노곡이다.
실제 사건의 전개와 달리 경쾌한 선율이 특징이다.
뉴올리언스 연쇄 살인 사건은 이 곡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데이빌라도 이름을 알리며 유명 작곡가로 거듭났다.
10여년이 흐른 뒤 유럽에선 ‘죽음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1933년 헝가리 작곡가 레죄 세뢰쉬가 쓴 ‘글루미 선데이’ 이야기다.
이 노래를 듣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자 죽음의 송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36년 헝가리 청년이 유서에 이 노래를 언급한 뒤 숨졌다.
이후 1930년대 동안 17건에 가까운 연쇄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공통점은 모두 글루미 선데이의 가사를 유서에 썼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1941년 이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비운의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가 편곡해 불렀다.
홀리데이가 부른 글루미 선데이는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딘가 쓸쓸한 홀리데이의 음색과 처량한 선율이 유려하게 어우러져서다.
하지만 홀리데이 때문에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비판이 일었다.
미국에서도 10여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글루미 선데이와 연관된 내용을 유서에 담았다.
작곡가 쇠레스조차 1968년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부르는 노래란 소식이 퍼지자 영국 BBC는 홀리데이의 글루미 선데이에 대한 방송을 금지했고, 미국 지역 방송국들도 뒤따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BBC는 2002년이 돼서야 금지령을 해제했다.
글루미 선데이에 얽힌 속설은 사실일까. 전문가들은 죽음을 부르는 선율은 어디에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우울한 선율이 흘러나오지만 죽음과 연관성이 얕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멜 토메(1958년), 레이 찰스(1969년), 비요크(1999년) 등 후대 음악가들은 이 곡을 리메이크했지만 비슷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상 도시 괴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런 괴담들 뒤엔 노래 그 자체를 분석할 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 시대의 음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루미 선데이를 들었던 것이지, 그 노래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 아니란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 이 노래가 유행할 땐 경제 대공황과 세계 2차대전에 대한 공포가 맞물리던 시기였다.
헝가리에서 ‘글루미 선데이’가 나온 1930~1938년에도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5만명을 웃돌았다.
1960년대부터 20여년 간 헝가리에서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0명을 웃돌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자살률 세계 1위(OECD 가입국 중)라는 이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이제 우리나라가 넘겨 받았다.
지금 우리 곁엔 ‘제 2의
글루미 선데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오현우 기자
한 남자를 집어삼킨 귀신과 죽음 ... '악마의 노예'가 된 뭉크
[arte 납량특집] 에드바르 뭉크 '절규'에 얽힌 이야기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
"마귀를 쫓으려면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오늘 밤에는 너희 중 그 누구도 잠들지 말아라."1868년, 에드바르 뭉크는 어머니를 잃었다.
고작 다섯 살의 일이었다.
다섯 남매의 둘째였던 뭉크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생생히 봤다.
엄마의 죽음 후,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 빠진 듯 종교에 모든 것을
의탁했다.
'광신도'가 된 것이다.
환자들을 수술한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술복을 벗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뭉크와 그의 누나, 그리고 여동생들을 불러모으는 일이 잦았다.
그리곤 아무 이유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때리면서 "기도하는 중에 내 아내를 보고 왔다"며 "너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엄마가 때리라고 시켰다"는 미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뭉크의 아버지는 밤마다 귀신, 죽음, 살인 등 공포스러운 내용이 가득한 책을 읽어준다며 남매들을 자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너희들은 매번 신의 뜻을 어기는 악마이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1899
뭉크는 그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한 손은 누나 소피에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여동생 라우라의 손을 잡아주며 공포에 질렸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귀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평생 뭉크를 따라다니는 망령이 된다.
나중에 그는 "나는 아버지에게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하나는 병약함, 또 하나는 정신병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엄마의 죽음보다 뭉크를 미치게 한 건 바로 누나 소피에의 폐결핵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의 폭력과 공포감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 라우라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혼자 웃다가 울고 침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뭉크는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었다.
이후 뭉크는 줄곧 '이제 내가 죽을 차례'라는 생각을 하며 죽음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다가 밤중 덜컥 일어나 내가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게 아닌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1879년 오슬로의 기술대학에 진학한 뭉크는 특유의 병약함 때문에 학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는 수업 중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뭉크, 그는 수시로 자살과 죽은 후의 지옥에 대해 생각했다.
불현듯 그는 펜을 잡았다.
"낙서 하나는 봐줄만한 놈" 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는 드로잉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뭉크는 1년 만에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었다.
천재의 탄생이었다.
"삶은 고통이다"라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던 뭉크는 잠시 떠난 프랑스에서 고흐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노르웨이에 돌아온 그는 우울과 피폐함을 그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그린 ‘죽음과
아이'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무서움에 덜덜 떨던 동생 라우라를 회상하며 작업했다.
1892년 독일 베를린.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서 프랑스를 꺾은 독일은 온 국토가 축제의 장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미술협회는 뭉크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줬다.
55점의 그림이 벽에 걸렸다.
그의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은 '악령의 사주를 받은 그림'이라며 경악했다.
사람과 죽음, 폭력의 이미지를 그리는 뭉크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지옥의 그림이다", "보는 것만으로
불길한 기운에 전염될 지 모르니, 관람에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성 문구가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단 8일 만에 뭉크의 개인전은 '뭉크 스캔들'이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뭉크는 이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의 노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일로 뭉크는 자기 자신조차도 두려울 만큼 유명한 화가가 됐다.
"죽음을 그리는 해골 같은 화가가 베를린을 뒤집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그의 명성은 고향 노르웨이를 거쳐 프랑스까지 퍼져나갔다.
뭉크는 어리둥절하는
대신 이 '지옥의 화가'라는 이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바로 악마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라며 스스로를 홍보했다.
인생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기분을 느낀 뭉크는 그 다음 해 세기의 역작을 내놓는다.
누구나 아는 작품, '절규'.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1893
'절규'는 뭉크가 친구와 함께 고향 시골 마을에서 산책을 하며 겪은 경험을 되살려 그린 작품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패닉이 온 뭉크는 엄마, 누나,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 낸 수많은 귀신과 악령에 시달렸다.
악령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해하려 하던 악몽과도 같은 순간을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이 작품은 음침함을 넘어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가 가진 평생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기괴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품을 내놓은 그의 나이는 갓 서른이었다.
뭉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가 됐다.
유명해진 후에도 뭉크는 여전히 신과 세상이 두려웠다.
사람도 무서워했다.
사랑에도 세 번이나 실패했다.
그는 수염을 덥수룩히 길러 얼굴을 가리면 세상과 신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날 땐 무조건 빛과 문이 없는 밀폐된 장소에서만 만났다.
정신병을 오래 앓던 여동생 라우라는 1926년 사망했다.
뭉크는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여동생의 죽음을 보면 예전의 트라우마가 다시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는 여동생의 장례를 나무 뒤에서 도둑처럼 또는 저승사자처럼 훔쳐봤다.
뭉크는 당시 50세였던 유럽인들의 평균 수명을 훨씬 뛰어넘은 80세에 세상을 떴다.
70세에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대십자 훈장까지 직접 받았다.
나치도 그의 악마스러운 그림에 감명을 받고 포섭하기 위해 몇 년을 공들였다.
물론 뭉크가 거절했지만.뭉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죽음과 망령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는 모든 것을 탈피한 현자처럼 세상 만물을 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주일에 두 번은 쓰러져 거품을
물던 뭉크는 장수했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니 악마도 그를 죽을 사람의 명단에서 지웠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정도였다.
그가 1944년 죽음을 맞이할 때 한 손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책 <악령>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나의 손을 쥐고 공포를 버텼던 5살의 그 자신처럼.죽음 이후 그의 집에서는 유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 점의 작품들이 쏟아졌다.
나치 정권이 언젠가 쳐들어 올 것을 피해 꽁꽁 숨겨놨던 작품들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키워야 할 자식도 없었던 그는 그림을 자신이 잉태해 낳은 자식이라고 여겼다.
하나가 없어지거나 팔려나가면 똑같은 작품을 또 만들었다.
그의 악령 들린 작품은 인류의 선물이 됐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고야의 '아들 잡아먹는 아버지', 알고 보면 더 무서운 3대 포인트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알고 보면 더 무서운 세 가지 이유루벤스 동명의 작품은 '또다른 공포' 선사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자식을 잡아먹는 부모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자극하는 장면이 또 있을까. 스페인을 대표하는 회화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1746년~1828)가 그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그 주제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음울하고 기괴한 색조와 형태는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는 더 무섭다.
무더운 여름 밤을 서늘하게 식혀 줄 세 가지 감상 포인트를 정리했다.
①신화 원본보다 무서운 이야기
작품 속 등장하는 괴물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경과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그리스 신화 이름은 크로노스). 신들의 왕이었던 그가 자식을 잡아먹게 된 건 어느날 ‘자식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저주를 받은 뒤부터였다.
저주가 실현되는 걸 막기 위해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이를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이런 패륜에 크게 슬퍼하고 반발했다.
그러다 한 명을 간신히 살려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주피터(제우스)였다.
장성한 주피터는 아버지에게 몰래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먹였다.
덕분에 뱃속에 있던 플루토(하데스)와 넵투누스(포세이돈) 등 주피터의 형제자매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주피터가 이들과 함께 싸워 아버지를 무찌르고 신들의 왕좌에 오르는 게 그리스·로마 신화 시작 부분의 얘기다.
고야가 1797년 같은 주제로 그린 습작.
하지만 이 그림에는 신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신화에서 주피터가 아버지를 이길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뱃속에서 나온 형제자매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싸워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사투르누스는 아이의 머리와 왼손을 이미 먹어치운 상태다.
꿀꺽 한 입에 삼키는 게 아니라 씹어먹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형제자매는 물론 주피터도 살아남을 수 없다.
부활이 불가능한, 영원한 죽음과 절망이다.
②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고야가 1819년부터 1823년까지 4년간 은둔 생활을 하며 그린 벽화들 중 하나다.
이 작품을 비롯해 이 시기 고야의 작품은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지금은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스페인-프랑스 전쟁에서의 양민 학살 장면을 표현한 고야의 대표작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프라도미 관 소장
고야는 잘 나가는 궁정화가로 평생을 큰 어려움 없이 유복하게 살았다.
그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무엇을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작가가 작품에 대해 어떤 설명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만명 넘는 사망자를 냈던 스페인-프랑스 전쟁에서 받은 충격과 인간에 대한 혐오를 표현했다는 설도 있고, 단순히 자신 안에 있는 예술혼을 드러낸 결과물이라는 설도 있다.
왜 이런 작품을 그렸든간에
이 작품에서 고야의 광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해보면 섬뜩한 점이 하나 있다.
심심풀이로 그림이나 만화를 그려봤다면, 한 번쯤은 자기가 그리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릴 때 고야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③ 정말 무서운 건
신화에서 사투르누스가 자식들을 죄다 삼킨 것은 ‘시간 앞에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상징한다.
주피터와 형제들이 사투르누스를 무찌른 건, 이 신들이 시간마저 이길 정도로 위대하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투르누스가 자식을 뜯어먹는 고야의 그림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인간은 물론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마저도 시간이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혀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뜻이니까.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구원의 여지 없이 절대적인 무(無)로 돌아간다는 얘기니까.
루벤스의 '사투르누스'(1636).
반면 루벤스가 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은 또다른 느낌의 공포를 선사한다.
자식을 삼키지 않고 뜯어먹는다는 점에서는 고야의 그림과 같지만, 화풍과 색채가 부드러워 직관적인 공포는 덜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고야의 그림 속 사투르누스는 광기에 취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루벤스의 그림 속 사투르누스는 누가 봐도 정신이 멀쩡하다.
맨정신으로 자식을 잡아먹고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욕망을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괴로워하는 얼굴이 보이는 정면에서 아이의 생살을 뜯어먹는 그 모습. 그리스 신화의 신이 사실상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존재라는 걸 감안하면 루벤스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이 제일 무섭다’고.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