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에로스 충동
김윤태
고려대 교수 (사회학)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과 함께 '에로스 충동'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목적을 남자와 여자를 하나라 만들고 서로 묶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죽음과 사랑은 항상 함께 나타난다.
사랑은 매우 취약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하지만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한다.
60세가 넘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이전의 생각과 달리 에로스 충동에 다시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악동”이자 인간의 삶의 의지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생애 마지막 영화로 <아이지 와이드 셧>(1999)을 만들였다.
이 해는 20세기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작가 아니틀러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를 영화 시나리오에 활용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성적 본능을 다루었다.
원작에서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이 배경이지만, 큐브릭은 영화의 줄거리를 20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의 세계로 대입했다.
큐브릭은 이 영화에서 능숙하게 인간의 감춰진 본능을 극적 긴장을 통해 표현했다.
성적 욕망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은 전형적인 중산층 부부의 행복한 삶의 이면에 숨격진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
두 사람은 각각 꿈 속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욕망과 만난다.
거장 큐브릭은 퇴페적인 '세기말' 분위기 속에서 <꿈의 노벨레>를 쓴 슈니츨러처럼 탁월한 심리분석가이자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천재적 연출가이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남녀의 잠재의식을
드러낸다.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주제일 수 있지만 큐브릭은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영상미로 영화는 흥미진진한 스릴러처럼 관객을 사로잡는다.
슈니츨러의 문체가 아름답듯이 큐브릭은 섬세한 장인 기질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세기말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활동했던 슈니츨러는 성공한 의사였지만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도박과 여성 편력에 빠져살면서도 수많은 성적 금기를 건드리는 연극을 썼다.
193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나치가 등장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은 '퇴폐'라고 낙인이 찍히고 금지되었다.
슈니츨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자신의 소설에 활용했다.
그는 빈의 세기말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성적 퇴폐를 묘사하는 풍속 작가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인간 내면의 억압과 저항, 전통과 자유, 소외와 사랑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회학적 작가로도 볼 수 있다.
나는 슈니츨러가 19세기 말 프랑스의 발자크와 러시아의 체호프처럼 인간 군상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묘사한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전통적 질서가 붕괴하면서 혼란을 겪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추적하는 슈니츨러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간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섹슈얼리티의 복잡함은 병적인 정신세계와 지나친 욕망으로 인한 타락의 인물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에로틱한 욕망을 표현한다.
롤리타
에로스에 대한 큐브릭의
관심은 오랜 전부터 발견된다.
큐브릭이 1962년 제작한 <롤리타>에서 억압된 본능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블라디미를 나바코브가 1955년 출간한 <롤리타>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거센 논란을 일으키고 판매 금지가 되었다.
어린 아이의 성을 다룬다는 이유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책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러시아 출신
나바코프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미국을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소설이라는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바코프는 근거 없는 비난과 정반대로 러시아 혁명 당시 해외 망명을 선택해야 했던 몰락한 상류층의 후예였다.
어쨌든 <롤리타>로 쏟아지는 비난과 함께 막대한 인세를 벌은 나바코프는 미국을 떠나 말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은밀한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이렇게 시작하는 <롤리타>의 이야기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유럽에서 미국에 건너 온 대학 교수 험버트 험버트는 12살 소녀 롤리타에 한 순간에 반하지만, 결국 롤리타에 의해 농락당한다는 이야기하다.
<롤리타>는
1938년 나바코프가 출간한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플롯과 유사하다.
원래는 1932년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제목으로 러시아어로 처음 출간되었다.
소설은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치정과 외설의 장면 대신 인간의 허위와 욕망을 둘러싼 어리석음과 음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멸에 빠진 부르주아 중년 남성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보여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롱과 경멸로 대한다.
어쩌면 나바코프는 주제 자체보다도 자신의
스타일로 위
과 욕망을 둘러썬 패러디를 보여주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에로스는 영원하다
1930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의 에로스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문명사회는 인간에게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쾌락 원칙'을 제한하는 문명사회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억압한다.
성적 리비도의 제약은 문명 사회의 본질이지만, 이를 뛰어넘는 에로스의 욕망은 언제나 다시 살아난다.
““인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물음은 문화적인 발달이 공격성과 자기-파괴의 인간 본능에 의해 야기되는 공동체적 삶의 교란을 제어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는지 하는 점처럼 보인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정확히 현 시점은 특별한 관심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서로를 절멸시키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현재 느끼는 안달과 불행과 불안의 정조의 많은 부분이 그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제 두 ‘천상의
힘들’의 하나, 영원한 에로스가 그의 동일하게 불멸하는 숙적과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주장하는 노력을 보일 것이라고는 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성공과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프로이트가 쓴 이
글은 1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고 다시 전운이 감도는 유럽에서 프로이트가 다시 에로스 본능에 희망을 거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죽음 충동'이 아니라 '에로스 충동'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인간은 죽더라도 에로스는 죽음에 맞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처럼 큐브릭은 다양한 우상을 해체했다.
프로이트의 책처럼 큐브릭의 영화는 차갑다.
큐브릭의 영화들은 비극적 삶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죽음 충동에 경악한다.
그러나 큐브릭은 사라지지 않는 에로스를 발견한다.
마침내 사랑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김윤태
고려대학교 공공정책대학 사회학 교수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저서로 <모두를 위한 사회과학>, <시민의 세계사>, <사회적 인간의 몰락>, <문화사회학의 이해>(공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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